돼지고기 잡내 없는 보쌈을 만들어 봐요~
요즘 같은
황사로 숨쉬기 힘들고
숨이 막힐 때면,, 삼겹살에
소주한잔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하지만,, 잦은 회식에 단골 안주인
삼겹살 보다는 좀더 기름기가 빠진
담백한 고기가 몸에도 좋고 아직 어린
저희 아들에게 몸에 좋을거 같은 마음에
보쌈용 돼지고기 수육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먼저 보쌈의 사전상의 정의는
‘삶아서 뼈를 추려낸 소 또는 돼지 따위의 머리를 보에 싸서 무거운 것으로 눌러 단단하게 만든 뒤 썰어서 먹는 음식’이나, 요즈음에는 냄새 없이 삶은 돼지고기를 편육으로 썰고 배추 속으로 만든 겉절이와 함께 배춧잎에 싸서 먹는 음식이다. 돼지고기를 삶을 때 된장, 간장, 생강, 마늘, 소주, 계피, 황기, 당귀를 넣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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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보쌈에는 다른 의미에 보쌈도 있습니다
정의
처녀 액땜을 위하여 밤에 외간남자를 보(褓)에 싸서 잡아다가 강제로 동침시키던 일.
내용
남편을 둘 이상 섬겨야 할 팔자의 딸을 위하여 조선시대 양반집에서 행하던 것으로서, 잡혀온 남자는 함구령이 내려진 채 방면되거나 때로는 죽음도 당한다. 보쌈은 이처럼 대체로 처녀를 위한 것을 말하지만 조선시대 하류층의 수절과부가 노총각이나 홀아비를 같은 방식으로 납치하여오는 일도 보쌈이라고 하였다.
처녀를 위한 보쌈은 불경이부(不更二夫)라는 과부의 재가금지제도에서 나온 일종의 약탈혼과 같은 것이었다. 보쌈한 총각과 동침하면 그 처녀는 과부가 된 것과 같은 결과가 되어 과부의 액운을 면하였다고 믿으며, 따라서 다른 곳으로 안심하고 시집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남정네들이 과부를 보에 싸서 데려와 혼인하는 풍습도 있는데, 이것도 일종의 약탈혼으로 과부보쌈 혹은 과부업어가기라고 하였다. 과부보쌈에는 과부 본인이나 과부의 부모들과 내약 끝에 보쌈해가는 방식이 있는가 하면 합의 없이 보쌈하여 약탈해가는 방식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은밀히 과부와 정을 통해오다가 혼인을 하기 위하여 보쌈의 형식을 빌려 주변의 이목을 속이면서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와 같이 강제로 보쌈할 때는 사전에 과부의 거처를 탐지해두었다가 밤중에 침입하여 보쌈한 뒤 억지로 정을 통하여 배우자로 삼는다. 이럴 때 가끔 가족과 난투극이 벌어지기도 하지만 법적인 문제로 비화되지는 않는다. 이 밖에 소박맞은 여인이 친정에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이른 새벽에 성황당에서 기다리다가 보쌈해가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소박녀는 남편이나 자기자신의 저고리 옷섶을 세모꼴로 찢은 ‘나비’를 지니고, 등에는 이불보를 진 채 성황당에서 서성거린다. 이 소박녀를 최초로 만난 남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데리고 살아야 하는 관습적인 의무가 지워진다.
소박녀는 성황당에서 서성거리다가 남정네를 만나면 ‘나비’를 내보인다. 그러면 남정네는 소박녀의 등에 진 이불보로 보쌈 하여 집으로 데리고 온다. 이러한 소박녀의 보쌈풍습은 여자가 귀했던 함경도지방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과부보쌈이나 과부들의 남성보쌈은 유교적 영향으로 불경이부라는 유교적 질서가 고착되면서 여성의 경우 비록 남편을 사별하였다고 해도 재혼하지 말고 수절할 것을 강요당한 결과 파생된 풍습이다. 과부의 재혼을 금지한 제도는 대체로 고려 말에 등장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와서는 더욱 강력하게 시행되어,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민간에까지 깊이 뿌리내린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에는 자녀안(恣女案)이라 하여 양반의 여자로서 부정한 행위를 하거나 세 번 이상 개가한 여성의 소행을 기록하여 그 자손의 관직등용을 제약하였으며, 조선시대 성종 때에는 ≪경국대전≫에 재가하는 부인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다는 조문을 제시하여 과부의 공식적인 재혼을 금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1895년 갑오경장에 의해 부녀의 재혼이 허용된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보쌈이 과부의 재혼금지제도 속에서도 비공식적으로 행해진 이유는 노총각이 죽어서 몽달귀신이 되거나, 과부가 죽어 원귀가 되면 가뭄이 자주 들게 된다는 믿음이나, 노총각이 많으면 민심이 흉흉해진다고 하여 어느 정도까지는 관에서 묵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쌈이 행해졌다고 해서 재혼금지의 제도가 실행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정조관념 및 과부의 수절을 강조한 전통사회의 문화적 풍토 속에서 음성적으로 행해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부작용도 많아서 혹시 수절을 결심한 열녀가 이러한 일을 당하면 자살 및 살인의 비극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76699&cid=1606&categoryId=1606 인용하였습니다
당시 관에서 어느 정도 묵인해 준 사실이 재밌습니다, 재혼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시절에 보쌈을 통한 재혼이라, 현대에서 시도만 해도
구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ㅎㅎㅎㅎ
이러한 보쌈김치는
해방 이후 1940년대부터 문헌에서 보쌈김치에 대한 언급이나
제조법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아무리 인터넷을 봐도 어떤 문헌인지 나오지는 않네요
돼지고기 보쌈 김치에 대한 자문을 구할 때가
그리 많지는 않았습니다
추상적인 내용에 글들이 많더군요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유추해 보면
임진왜란 후 조선에 고추가 들어오면서 기존에 백김치에서 빨간색 김치로
진화 했습니다
노비들 입장에서 보면, 매년 김장철 때 마다 절인 배추를 만들려면
당시 넉넉한 찬거리가 없다 보니, 수백 포기가 작업량에 기본으로 보입니다
힘들게 일한 이들에게 보답으로 내려진 돼지고기 수육
을 먹다가 어느 날 방금 담근 빨간색 김치를 싸 먹어 보니, 그 맛이 너무나 환상적이다 못해
막걸리와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죠
ㅎㅎ
같이 보쌈을 먹던 마님들 역시 그 맛을 잊지 못해
평소에도 즐겨 먹다가, 손님들에게 대접하기 시작하면서 널리 퍼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ㅎㅎㅎ
즉, 돼지고기 보쌈은 조선에 고추가 유입된 1600년대부터 라고 볼수 있지
않을까 하는 제 사견입니다.
동감하시나요??
그럼
그당시 노비들에 입장에 생각해 보면서
보쌈용 돼지고기 수육을 시작해 보겠습니다
<보쌈용 돼지고기 수육입니다>
언제나 처럼 거창하게 만들 필요는 없지요
저희집은 아들이 수육을 좋아해서
매번 할때만다
3근 이상을 해 놓아요
역시나 정해진 레시피는 없습니다
그날 그날 냉장고 상태와
재료 상태를 보면서
만드는 홈메이드 아빠표 요리입니다
조리시간 : 대략 50분
분량 : 6인분
1. 재료를 말씀드리자면
먼저 시장 정육점에서 구매한
1). 덩어리 껍질 있는 돈육 앞다릿살 1,2KG, 덩어리 껍질있는 삼겹살 600G 입니다,
많죠?, 집들이 수준이라고 해야 하겠네요
일반적인 3인 가족들이 드시기에는 많습니다(3인 가족 기준 1.2kg이면 좋을 듯)
앞다릿살은 근육에 발달이 삼겹살에 비해 많고 지방에 함량이 삼겹살에 비해
적기에 삼겹살과 반대로 약간 질기면서 담백한 맛을 볼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돼지냄새가 많이 나고 비계부분이 적어서 부드러운 맛이 덜해요
그래서 저는 항상 가격이 저렴한, 앞다릿살과, 삼격살을 섞어서 만들곤 합니다
2). 대파 4대
3). 양파 1개
4). 마늘 10쪽
5). 월계수잎 8잎가량
6). 생강 한쪽, 또는 반쪽
7). 카레 3스푼
8). 된장 3스푼
2. 조리과정입니다
1). 깨끗한 물속에 준비한 돼지고기를 대략 20분 가량 담거서 핏물을 빼주세요
2). 양파 1개을 옆썰기로 썰어주고요
3). 냄비에 물을 담가 준비한 부재료를 다 넣으세요, 카레 가루는 고기에 잡내를 잡아주고요
특유에 카레 향이 식욕을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4). 끓기 시작하면 중불로 대략 30분에서 ~ 40분 삶으면 다 익어요
5). 30분 후 부터는 젓가락을 찔러서 핏물이 묻어 나오지를 통해 익었는지를 확인할수 있습니다
6). 완성된 돼지고기 수육입니다, 너무 뜨거워서 지게를 이용했습니다 ㅎㅎㅎ
<표면에 노란 느낌은 카레에 영향입니다>
부드러운 삼겹살과, 담배한 앞다릿살을 느낄수 있는 정말 쫀득하면서 맛있는 수육이 완성 됐습니다
먹다 남은 수육은 비닐에 국물까지 같이 포장해서
냉동고에 보관하세요
드시고 싶을 때 꺼내서 바로 먹을수 있습니다
그럼 여러분도
한번 만들어 보세요